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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ADING


삶의 질
―연재를 시작하며

허영균

측정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삶의 질이란 가능한 높여가는 것이 좋다. 본인의 삶에 대단히 만족하거나 혹 그렇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쪽이 맞다. 이를 위한 지혜도 이론도 넘치는 가운데, 나에게도 삶의 질에 관한 검증된 가설이 있다. 안타깝게도 내 가설은 망치는 쪽 얘기다.

나에게 있어 삶의 질은 마감과 관계가 있다. 어림잡아 따져보면 12년 전인 2012년, 마감 인생이 시작되었다. LIG 문화재단에서 발행하던 계간지 ≪InterVIEW≫의 에디터가 되면서 일 년에 고작 네 번뿐인 마감이 삶을 얼마나 괴롭힐 수 있는지 배웠다. 초, 분, 시, 하루, 월은 당시 의미 있는 시간의 단위가 아니었다. 초보 에디터에게는 겨울, 봄, 여름, 가을, 다시 겨울만이 시간의 의미를 대신했다. 학업과 병행했던 일 년 조금 넘는 시절이 꿈같이 끝난 뒤에도 삶은 마감과 줄곧 한패였다. 잡지에서, 웹진에서, 학교에서… 글쓰기와 마감을 본업으로 살아가는 분들께는 한참 못 미치는 얘기지만, 끝나도 끝나지 않은 기분, 늘 실패를 남기는 결과, 복기할 수 없는 실수를 마주하는 10년이 쉬울 리는 없었다. 끝이 시작과 맞물려 있는 일들이 그러하듯이. 몇 해 전 지하철과 버스를 탈 수 없게 된 이후 삶에서 뭔가를 내려놔야 하는 시기가 왔음을 알았다. 무한증식하는 일과 그에 비례하는 열정에도 불구하고, 반대쪽에서는 유한하고 부실한 삶이 오래전부터 입을 벌리고 있었다는 것을. 그러나 깨달음만큼이나 실행하는 것도 시간이 필요했다. 어느날 마지막 교통수단과도 같던 택시에서 내리는 문의 가죽을 손톱으로 긁어 찢어 놓고야 말았을 때, 이미 한참 전에 내려야 할 곳을 지나쳤다는 것을 알 수밖에 없었다.
한 지역 문화재단의 매거진과 공연예술해외교류 정보지의 편집장으로서 임기를 마친 2022년이 되어 마감이 있는 삶은 10년만에 휴업을 맞이했다. (집필과 편집이 주업은 아니었기에 종사자 및 전문가 선생님들께 이 엄살스런 글을 정중히 사과드리며, 한편으로 묵직한 존경을 보낸다.) 그 사이의 웹진 ≪춤IN≫과 ≪연극IN≫에서 주셨던 감사한 지면들과의 이별이 있었고, 엉뚱한 방면으로 주어지곤 했던 기고의 기회들도 냇물 마르듯 멈추었다.

새해 첫 날, 안부 인사를 겸하며 올해 하고 싶은 일들을 적다가 그 느슨한 목록 속에 ‘연재하기’라는 기묘한 희망사항이 끼어 들어가 있는 것을 보았다. 약속된 것도 없고, 감히 그럴 생각도 없지만 망각은 내 삶(의 질)을 저주하듯이 혹은 축복하듯이, 다시 마감 앞에 데려다 놓았다. 버스 맨앞자리를 좋아하고, 3호선을 타고 예술의전당에 가길 즐기며, 이제는 운전면허도 있는 지금의 내가 누구도 제안하지 않은 약속을, 홀로, 빈종이에 하고 있는 셈이다.

현재는 반성에서 시작한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은 반성하는 시점의 반대 면이다. 마감이 없던 2년 동안 나는 거의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 보지 않고 잘도 말하고, 보지 않고 많이도 만들었다. 게으름보다는 무심함에 대한, 무심함보다는 미온함에 대한, 미온함보다는 게으름에 대한, 게으름보다는 무심함에 대한, 다시 미온함에 대한, 게으름에 대한, 무심함에 대한… 아무튼 이 모든 것에 대한 반성의 무게가 문진처럼 약속의 종이를 누른다.
빚을 갚는 마음이 아니라 여행이 다가올 때의 마음으로, 상환하는 작업이 아니라 출발하는 작업으로 좀 더 세상을 보고, 타인을 보고, 작업을 보겠다는 한 줄 짜리 다짐에 밑줄을 그으면서. 반드시 되돌아 오고야말 끝나도 끝나지 않은 기분, 늘 실패를 남기는 결과, 복기할 수 없는 실수를, 결국은 추락하는 삶의 질을 맞이 하겠다고 여기에 써보는 것이다. 미뤄도 대안이 없을, 부끄러움을 삼키는 연습. 2주에 한 번 보러 오세요. 저의 보는 연습을. 그리고 제가 보러 가길 원한다면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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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도씨와 온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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